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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ESSAY] <자기 앞의 생>​,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No.187]





<자기 앞의 생>,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내 앞에 놓인 삶, 여생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를 직역해 지은 모호한 제목 ‘자기 앞의 생’은 신비로운 안개처럼 작품을 감싸고 있다. 이 소설은 전성기의 영광을 뒤로한 노년의 작가 로맹 가리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단순한 필명이 아니라 오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를 에밀 아자르 역으로 ‘캐스팅’해서 대중 앞에 내세웠다). 늙은 로맹 가리가 재능 있는 오촌 조카 에밀 아자르를 질투하고 표절한다고 수군거린 문단의 명사들이나, 완전히 빛바랜 로맹 가리와 눈부신 에밀 아자르를 신나게 비교해 댔던 평론가들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든 드라마틱한 반전은 작가가 권총 자살을 한 지 6개월 후 소책자 형식의 유서를 통해 밝혀졌다. 이만하면 프랑스 현대 문학사의 가장 좋은 자리에 올려놓을 만한 로맨틱하면서도 위트 있는 장엄한 비극이다.

『자기 앞의 생』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모모와 그를 돌봐주는 로자 아줌마는 마치 로맹 가리처럼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의 삶을 가상의 이야기 속에 집어넣고 아무렇지 않게 ‘설정’을 바꾼다. 무슬림 모모는 유태인 모세가 되기도 하고, 열 살 꼬마였다가 한순간에 열네 살 청소년이 되어버린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뻔한 표현이 나름 정확하기는 한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또 새삼스럽다. 『자기 앞의 생』이 발간된 1975년부터 로맹 가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1980년까지 5년 사이에 일어난 이 모든 사건이 실제로 ‘작가’ 로맹 가리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마치 원고지 위에 펜으로 창작을 하듯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기승전결을 갖춘 한 편의 이야기로 완성한 것이다.


모모는 사랑해서, 미워해서, 괴로워서, 견디기 위해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속인다. 아이가 만든 거짓말을 달리 말하면 ‘이야기’가 된다. 카펫을 짜는 늙은 무슬림 노인과 인정 많은 유태인 의사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도망칠 구석, 숨 쉴 구멍을 만드는 아이를 토닥이며 너는 시인이 될 거라고도 하고, 빅토르 위고 같은 작가가 될 거라고도 몇 번이고 말한다. 모모가 정말로 위대한 작가가 되어서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자전적인 소설을 남긴 것이면 좋았을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연극으로 무대화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라서가 아니다. 차라리 로맹 가리의 단편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서 아무 작품이나 골라 연극으로 만든다고 하면 참 흥미로운 도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앞의 생』은 모모의 서술을 좇아가는 내용과 소설이라는 형식이 분리 불가능한 수준으로 서로를 깊이 끌어안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 소설을 시공간의 제한을 받는 극예술로 바꾸기 위해 압축하고 지워야 하는 부분들에 비해, 그 빈자리를 채우는 상상력이나 배우들의 연기로 얻을 수 있는 입체감과 생동감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온전히 모모의 시선을 따라 전개되던 원작과 달리 연극 <자기 앞의 생>은 긴 세월 고통받다가 마침내 시간 앞에서 무너져가는 한 인간과, 오직 그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온 한 아이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다.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그것이 원작의 무엇을 훼손시켰고 무엇을 빛나게 했는지 따지고 싶지 않다.

촛불을 켜고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최후의 고난을 깊은 어둠 속에서 함께 견디는 로자와 모모를 기억한다. 캄캄한 지하실 구석에 몸을 숨기고 세상에서 하나 뿐인 사랑하는 사람의 생이 사그라질 수 있도록 지키던 모모. 무대 위의 그 순간은 원작 소설 전체와 같은 무게로 다가왔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처음 발견한 곳은 중학교 교실 뒤 학급문고에서였다. 교과서 밑에 숨겨놓고 읽으면 뭐든 재미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미 불명의 제목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실은 루이제 린저의 유명한 소설 『생의 한가운데』와 혼동했다). 누가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도 모를 그 낡은 책을 수업 시간 50분 내내 고개 한 번 들지 못하고 읽었다. 처음에는 좀 특이한 이력의 프랑스 작가가 쓴, 조금 더 심각하고 어두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정도로만 생각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억지로 울음을 누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지만 순전한 우연으로 이런 책을 발견한 행운에 기쁘고 감사했다.


그러나 20여 년 전 그때, 모모와 비슷한 나이였던 나는 병아리보다 큰 생명체의 죽음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어느 지경으로 처참하게 풍화시키는지도 눈치챌 기회가 없었고, 그렇게 무너져가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몰랐다. 생의 고통이 맨살에 닿는 감각이 어떤지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 때였다. 그리고 지금, 아르투르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모를 보면서 실감했다. 그때의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만큼 나이 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가야 할 ‘여생’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인간은 자기 앞에 높인 삶을 견디기 위해 사랑을 한다. 모모가 남긴 마지막 말대로라면 ‘사랑해야 한다’. 귀하거나 천하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사랑하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해준다.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채로 지켜보았던 연극 <자기 앞의 생>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이 그 사실만큼은 한순간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7호 2019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글 | 김영주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 국립극단



러브잇 3|클리핑 0|조회수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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